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터 섬 (문단 편집) === 재안정화 === [[내셔널 지오그래픽]]에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후기는 그 정도로 막장이라고 볼 수는 없다. 후기에 자원이 떨어져서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은 맞으나 섬에 살던 세 [[부족]]이 그렇게 멍청한 인간들은 아니었다. [[모아이]] 건설의 중지로 더 이상의 황폐화는 막았지만 [[기근]], [[식인]], [[전쟁]]의 반복으로 섬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가 되어있었다.[* 야자수가 전멸해버려서 토양 침식이 심해짐은 물론이거니와 식수를 구하기조차 어려웠을 것이다.] 결국 1640년 무렵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어 복구될 가능성도 없어지면서 다른 시스템이 등장하였다. 모아이 숭배와 신앙은 사라졌고, 후기 이스터 섬에서 나타난 새로운 신앙은 조인(鳥人) [[마케마케]]였다. 부족들은 당장 먹을 게 없는데도 쌈박질이나 하는 멍청한 행각은 그만두고 버드맨 의식[* 이스터 섬의 식량난을 타개하고 사회 시스템을 안정시킨 인물인 이비 투푸나(Ibi Tupuna)가 만들었다. 거창한 의식은 아니고, 성지 오롱고(Orongo)에서 출발하여 절벽을 타고 내려가 험한 바다를 헤엄쳐 건넌 뒤 모투 누이(Motu nui) 바위섬에 있는 새(검은[[제비갈매기]]) 둥지에서 알을 가져오는 것. '''가장 먼저 가져온 사람이 속한 부족이 그 해의 주도 부족이 된다'''. 가톨릭이 들어오고 토착신앙이 많이 약해진 지금도 이 의식은 남아 있다.]이란 평화로운 방식으로 섬을 주도하는 부족을 1년마다 뽑고 자원을 분배했다. 의식에서 1등을 한 사람은 마케마케의 현신 '탕가타 마누(Taŋata Manu)로 불렸다. 물론 자원이 극단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이들도 자신들의 미래를 점치기는 힘들었다. 그나마 숲이 사라지면서 농경지 전체 면적은 늘어났기에 수확량은 줄어도 더 넓은 땅에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인구를 지탱하고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다. 이들은 식량부족으로[* 대전쟁으로 인한 사회 시스템 파괴 가설을 부정한다면 식량 부족이 아닌 주식이나 별식으로 사탕수수를 먹는 문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.] [[사탕수수]] 즙을 먹었는데, 그것 때문에 20세가 될 때까지 [[치아]]가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. 이렇듯 최소한 어느 정도의 희망은 있었지만 이 조그만 희망마저 철저히 깨부숴버린 건 바로 [[남아메리카]]에서 찾아온 [[페루]]인의 도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